오에 겐자부로 '체인지링'

2009. 8. 28. 15:48 from Book


".....그렇게 된 거지. 나는 건너편으로 옮겨가네. 하지만 자네와의 교신을 끊은 건 아냐."


살아가면서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몇이나될까. 연인과 헤어지거나 친했던 친구와 헤어지게됐을때도 서운한 마음이 생기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잃게되었을 때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나 할런지. 소설의 주인공인 고기토는 서재의 간이침대에서 선잠을 자다 자신의 오랜 친구이자 아내의 오빠이기도 한 영화감독 고로의 자살소식을 전해듣는다. 그것도 자신의 아내에게서.


 누군가의 인기척에 이내 눈을 뜨고 말았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내의 머리가 서재를 가로지르는 천장의 형광등 불빛을 받으며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고로가 자살을 했어요. 당신을 깨우지 않고 나가려 했는데 매스컴에서 계속 전화공세를 해대면 혹시 아카리가 놀랄까 봐."
 치카시는 고기토가 열일곱 살 때부터 알고 지낸 절친한 친구이자 자신의 친오빠에게 생긴 일을 고했다. (p 12)

머리에서부터 스웨터를 꿰어 입은 고기토가 자, 하고 물장군 쪽으로 팔을 뻗자 그녀는 "그걸 가지고 가서 어쩌려고요?"하고 확실한 제지 의사를 표명했다.
"그건 고로가 보내온 테이프들을 듣던 녹음기잖아요? 평소의 당신이라면 그런 무의미한 짓을 해서 뭘 어쩌겠느냐며 오히려 화를 냈을 텐데?" (p 13)



체인지링은 크게 세 덩어리의 시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고로의 죽음을- 그가 남긴 물장군을 통해 자기만의 방법으로 받아들이는 고기토의 시간과 고로가 남긴 말에 떠밀려 '쿼런틴'의 시간을 갖는 고기토. 그리고 치카시의 시간.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가장 인상적이였던 것은 고기토가 물장군을 통해 고로와의 대화를 반복하며 후회하는 장면이였다. 그가 살아있을때 물장군에로 보내왔던 메세지 중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던 작은 부분들(지금 닥친 현실과 비교했을때 의미심장하게 들리는 메세지들)과 자신의 무심함을 후회하고 또 후회하며 반복해서 다른 메세지를 찾아헤매는 모습이 이 이야기가 오에 겐자부로 자신의 이야기라는 것과 맞물려 더 가슴 아프게 느껴졌던 것 같다. 있을 때 잘하지, 라는 말은 누구나 하고 있지만 막상 잃기 전엔 잘 안되는 거니까.

두번째 읽었을 때에도 나는 오에 겐자부로를 고기토에 대입해 그의 감정의 흐름만을 집중해서 살폈었는데 세번, 네번째 읽으면서 새롭게 발견한 것이 고로와 고기토에게서 독립적이란 평을 들은 치카시의 마음이였다.


 치카시는 팩스로 보내온 문장 중에서, 특히 '어미 곰이 핥아놓은(버릇 들여놓은) 부분을 서서히 버리라고 가르친다' 라는 부분에서 자극을 받았다고 했다.
 "나는 이 문장이 고로를 아주 잘 표현해준다고 봐. 오빠는 우리 어머니, 그러니까 어미 곰에게 그야말로 핥듯이 양육되었거든요. 평범한 일본어 표현대로 하자면 그야말로 핥듯이 귀여워하며, 라는 게 되겠죠? 어린 시절 고로는 동생인 내가 보아도 정말 핥듯이 귀여움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나는 질투하지 않았어. 특별한 사랑을 받는 것이 당연하다 싶을 정도로 고로는 아름다운 용모의 아이였던 데다 교토의 출판사가 책의 장정을 부탁해올 만큼 그림도 잘 그렸고...전쟁 중이었지만 과학교육을 시키려고 국가에서 만들었던 특별학급에도 뽑혔었잖아?" (p 75)


치카시도 고기토와 마찬가지로 고로를 '특별한 인간'으로 분류해두고 있었다. 나와는 다르게 빛나는 사람으로 정의해두고 그를 한발짝 떨어져서 바라봤던 것 같다. 그러다 그의 죽음을 겪게되면서 자신의 오빠를 조금 더 이해하게 됐다고 할까. 그가 죽고나서야 자신과 그의 사이에 있었던 공통점을 찾아내기도 하고 또 고기토가 모르는 고로의 부분을 회상하며 끄집어냈다. 의식과 무의식 양쪽에서, 고기토가 침울해질 정도로.

책을 읽으며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칠 수 있는건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영향이란 것은 만난 기간과는 상관없는거구나, 하는 것도 새삼스럽지만 다시금 알게 되었다. 짧은 기간동안의 인연이 긴 세월에 거쳐 고기토에게 상처를 남기고, 그 한때가 고기토와 고로의 영혼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는 것도. 고기토와 고로가 오랜 시간에 걸쳐 쌓아온 추억과 감정의 교류와 그것이 만들어낸 서로에 대한 영향력도. 치카시가 고로와 함께 자라오면서 알게모르게 만들어진 그와의 공통점과 우라가 고로를 만나 가졌던 교류의 시간들, 그리고 그녀가 그 시간을 바탕으로 정한 앞으로의 방향까지. 한 사람이 살아가면서 주위에 끼치게 되는 영향도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떠난 사람은 떠났어도 산 사람은 살아야한다는 말처럼 고로가 자살한 '납득할만한' 이유를 찾지 못한 채 헤매이던 고기토는 고로가 남겨준 물장군과 시나리오를 통해 기억을 되돌린다. 그리고 물장군에 남아있는 메세지와 소중한 사람에 대한 기억은 고기토에게 완수해야할 무언가를 정해준다. 거기에는 치카시의 쐐기도 한 몫하지만, 어쨌든 고기토는 해야할 일을 찾아 일어섰다. 치카시도 상처를 달래줄 그리고 자신에게 소중한 일을 찾아냈다. 우라도 부모님과 맞서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기로 결정했다. 남은 사람들은 그렇게 새로운 다짐을 하고 그 다짐을 지키기위해 살아가기로 한다.

"어느날 절망이 찾아왔다. 그리고 희망이 시작되었다." 살아있는 사람은 계속 살아가야하는거니까... 절망에 빠지는 그 순간 남은 것은 희망을 되찾는 것이 아닐지. 빈 자리를 인식하고, 괴로워하고, 믿지 못하고, 계속 더듬어보면서도 결국엔 상처에 새살이 돋듯, 그 빈자리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남아있는 흔적과 함께 살아가는 것으로 남은 자는 극복하고, 또 살아가는 게 아닐까. 조금 엉뚱한 연결일진 모르지만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그러니까 당신도 살아'라는 여자변호사의 책제목이 떠올랐다. 내게는 몇번을 읽어도 좋은 소중한 책. 나중에 한번 더 읽었을 때는 또 다른 부분이 보이겠지. 그때를 위해 다시 책장에 꽂아둔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마음에 걸렸던 부분들..

고로가 건물 옥상에서 추락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밤에도 택배로 도착한 새 테이프를 침대에 누워서 듣고 있었다. 고로가 이야기를 이어가는 틈을 보아 고기토는 이쪽의 감상에 해당할, 자연스런 응답을 끼워넣기도 했다. 이날 밤 일 가운데 특히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조만간 자기 말도 녹음할 수 있도록 다른 녹음기를 하나 더 구해서 고로와 자기의 대화라는 제 3의 테이프를 편집하자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p18)

그러다 보니 고기토에게는, 바로 이 그림이 자신을 향한 유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공중에 떠서 물장군을 휴대전화 삼아 고기토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고로의 자화상.
".....그렇게 된 거지. 나는 건너편으로 옮겨가네. 하지만 자네와의 교신을 끊은 건 아냐." (p 22)

새삼스레 고기토가 고로의 죽음이 가지는 비참함, 잔혹함에 몸서리쳤던 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 때문이었다. 고기토 앞에 고로가 모습을 보이는 일이 드물어진ㅡ말하자면 영화감독으로서의 성공이 그런 여유를 빼앗아버린ㅡ최근 십여 년 동안 고로는 이런 언어들에 둘러싸여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탓에 물장군으로 들려주기 위해 별도의 언어로 녹음한 테이프를 내게 보내온 것이다. 그건 혹시 고로가 생애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언어를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p 25)

고기토는 플레이야드판으로 [고별]을 읽고 새삼스레 절박한 마음이 들었다. 자살을 하기 전에 고로가 녹음을 하며 [고별]이야기를 했을 때, 그 녹음 테이프에 담긴 인용문이 증거지만, 고기토가 보내준 새 번역본을 곁에 두고 있었다. 고기토 쪽에서도 시의 전문이 금세 떠오를 거라 믿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기토는 제대로 된 응답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자기가 고로에게 가장 잘된 번역이라며 권했던 우사미의 새 번역도 솔직히 젊었던 그 시절처럼 손으로 베껴가며 외울 만큼 애착이 있거나 한 건 아니었다. 이러한 어긋남에는 요즘처럼 어쩌다 한번 얼굴을 마주치는 상황도 원인이 될 수 있었겠지만, 결국 고로는 고기토에게조차 의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절망한 나머지 쿵ㅡ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어버린 것은 아닐까? (p 33)

"그보다 오빠는 하늘을 그리고 싶었던 걸 거예요. 정말로 아름다운 색의 하늘이니까...베를린 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그린 그림인 것 같아요. 그때는 가츠코 씨와 헤어지고서도 꽤 오래 지났을 시기니까 외국영화수출입 업계 쪽에서도 그녀와 친했던 사람들은 이미 없고, 자기 영화가 몇 작품 알려져 있긴 해도 이젠 좀 더 새로운 감독의 시대가 왔거든요. 그러니 여러모로 우울했을 테죠. 매일 매일 아침부터 날은 우중충하고 오후 4시만 되면 어두워지고, 겨울의 베를린은 인간이 살 곳이 못 된다고도 하더라구요. 그런데 이 그림은 명랑한 분위기잖아요.
길을 걷다가 특이한 수채화용 색연필을 발견하곤 무심결에 사버린 것이겠지만, 거기 와서 처음으로 맑게 개인 베를린 하늘을 호텔방에서 멍하니 보고 있으려니 어디 한번 그려볼까 하는 마음도 들고...근데 마땅한 도화지가 없어서 대신 영화제 프로그램 같은 것의 표지를 잘라서...뭐 그런 식이겠죠." (p 56)

치카시가 고기토와 결혼하고나서 깨닫게 된 것 하나는 남편이 무언가 의문이 제기되었을 때 입을 다물고 있을 수 없는 성격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자신과 고로에 관해 이야기하자면ㅡ이것은 보기 드문 공통점일 텐데ㅡ입 밖에 내어 반론하기보다는 잠자코 있는 쪽을 자연스럽게 느끼는 인간인 것이다. 치카시는 하루에도 몇 번씩 남편이 묻는 것에 대답하지 않았다. 실은, 교제를 시작하고 나서 결혼을 하고 한참 뒤까지 남편이 하는 소리를 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남편과 고로가 이야기를 나눌 때, 자주 남편의 질문에 고로가 침묵으로 대하는 것을 보았다. 그럴 때면 고기토는 가끔 시무룩해지기도 했지만 치카시는 그것에 마음을 써봤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치카시는 자신이 남편에 대하여 드러내고 마는 침묵과, 고로가 역시 고기토를 향해 보이던 침묵에는 공통점ㅡ역시 보기 드문 것이지만ㅡ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p 331)


Posted by 젤리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