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혜린이야기

2009. 10. 20. 20:06 from Book

정화는 가능한 한 남자 여자 구별 없이 누구나와 자연스럽게 사귀고 놀도록 하고 싶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 초,중,고,대학을 모두 남녀 공학인 학교에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정화가 자라나고 성숙하고 소녀에서 여자로 되고 사랑을 하게 될 날을 생각하면 지금부터 가슴이 뜨거워진다. 찬란하고 행복한 청춘을 보내게 해주고 싶다.

정화가 의식 못하도록, 내 존재가 정화에게 눈에 띄고 방해되지 않도록 은밀한 방법으로 정화의 행복을 형성해 주고 싶다. 얼마나 아름다운 기억이 나의 소녀 시절에도 있었는가? 감동과 희열과 행복감이! 그것의 전부를 아니 그보다 몇백 배를 정화가 갖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울었던 눈물과 괴로움은 전부 생략시켜야 한다. 절대로 '버림받은 느낌'을 주지 않아야 한다. 어떤 고뇌와 슬픔 속에서도 '무엇인지' 있다는 느낌을 주고 싶다. 노골적으로 '어머니'가 있는 느낌, 다시 말하면 의뢰심이 아니고 보다 깊고, 보다 간접적으로 아이의 절망을 도와 주고 싶다. 생각만 해도 즐겁다.

다 커 있을 정화, 자기의 영혼을 다 바치고 사랑할 남자를 찾았을 때의 정화, 결혼을 하고 어린애를 낳는 정화는 상상만해도 흐뭇하다. 즐거워진다. 나는 정화의 아기를 하루에도 열 번은 보고 싶은 것을 눌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몹시 행복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293쪽)


이런 글을 썼으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모성애가 부족한것인가 걱정하고 딸의 행동 하나하나에 행복해했다. 그리고 이 일기를 쓰고 3년 후 그녀는 자살을 했고, 딸은 엄마를 잃었다. 읽을 때마다 싱숭생숭한데 역시 그녀가 왜 그토록 사랑하는 정화를 두고 죽기로 결심했는지 알 수 없어서 계속 책을 찾게 된다. 이 책에는 없다. 다음 책엔 65년도의 이야기가 담겨있을까.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의 마지막 일기는 63년도의 일기다. 3월 x일이라고 적혀있는 일기의 마지막 부분은 이것.


"내가 나 자신의 생을 포기하는 분량만큼 정화의 짐이 무거워진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가장 자연적인 관계, 한 살과 한 영혼인 관계가 이처럼 복잡한 '너와 나의 관계'로 되는 데에 출산과 육아의 또 하나의 크나큰 신비가 있는 것 같다."



사실 이 밑에는 리카르다 후흐의 시가 있지만 어쨌든. 그녀의 이야기는 저 부분이 끝이니까 마지막 부분. 역시 모르겠어..




Posted by 젤리빈 :